한때 ‘철밥통’이라는 수식어조차 무색해질 만큼 외면받던 9급 공무원이 다시 취업 준비생들의 꿈의 직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경기 불황과 청년 취업난이 길어지면서 MZ세대가 안정성을 우선시하는 흐름 속에서 공무원직을 새로운 ‘탈출구’로 선택하고 있는 것. 올해 국가공무원 9급 경쟁률이 9년 만에 반등했다는 소식과 함께, 노량진 고시촌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취업 경쟁력 없다 느껴"…공무원 시험장으로 몰리는 청년들
22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의 한 공무원 학원. 9급 공무원 시험 전략 설명회가 열리는 강의실은 영하권의 추운 날씨에도 50여 명이 몰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설명회에 참석한 신모 씨(27세·여)는 "요즘엔 다들 스펙이 워낙 좋다. 몇 년씩 유학 다녀온 사람도 많은데, 그런 사람들과 경쟁하다 보니 내가 경쟁력이 없다고 느껴졌다"며 공무원 시험 준비를 결심한 이유를 털어놨다.
한 회사에 다니다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는 김혜지(25) 씨도 비슷한 이유를 들었다. 김 씨는 "중소기업에서 일했지만 잦은 야근과 시간 외 수당 미지급에 시달렸다"며 "떨어져도 이유조차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채용 과정보다 합격 기준이 명확하고 초과 수당도 제대로 지급하는 공무원이 훨씬 나아 보였다"고 말했다.
누리꾼들도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사기업에서 몇 년씩 고생하는 것보다 공무원 시험 준비가 더 현실적이다", "공무원은 급여라도 안정적이니 요즘 같은 불황에는 좋은 선택", "그래도 9급 공무원이 쉽지는 않다. 경쟁률 보면 헛된 희망은 금물"이라는 의견이 잇따랐다.
9년 만에 경쟁률 반등…"안정성이 최고 스펙"
실제로 올해 국가공무원 9급 경쟁률은 24.3대 1을 기록하며 2016년 이후 처음으로 상승했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올해 선발 예정 인원은 4330명으로 지난해(4749명)보다 줄었지만, 지원자는 오히려 늘어 10만5111명이 접수했다. 경쟁률은 2022년 22.8대 1, 지난해 21.8대 1로 하락세를 이어오다가 이번에 9년 만에 반등했다.
노량진 고시촌에서도 변화는 뚜렷하다. 한 공무원 학원에서 4년째 상담을 하고 있는 직원 김모 씨는 "최근 대학교 4학년과 군 전역 직후의 20대 초중반 청년들이 학원을 찾는 비율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전했다. 다른 학원 관계자 역시 "내년 경쟁률도 올해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며 "과거처럼 '9급은 안 간다'는 분위기는 사라졌다"고 말했다.
"월급 300만 원 된다니…" 공무원 처우 개선이 인기 반등 불렀다
공무원 선호도 상승의 배경에는 정부의 처우 개선 정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는 지난해 저연차 공무원의 이탈이 증가하자, 9급 공무원 초임 보수를 단계적으로 300만 원까지 인상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올해 월 269만 원이던 9급 초임 보수는 내년 284만 원, 2026년에는 300만 원까지 오를 예정이다.
하혜수 경북대 행정학과 교수는 "2030세대는 급여와 근무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초임 보수 인상은 공무원 시험 경쟁률 반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청년층의 일자리 상황이 악화된 것도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전체 취업자는 노인 일자리 정책의 영향으로 전년 대비 13만5000명 증가했지만, 15~29세 청년 취업자는 21만8000명 줄어 2021년 이후 최대 감소 폭을 기록했다.
청년 일자리 절벽 속, 공무원직이 ‘최후의 보루’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경기 불황기에는 수입보다 안정성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며 "젊은이들에게 공무원은 불확실한 사기업 대신 명확한 기준과 고정적인 수입을 제공하는 매력적인 선택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반짝 인기’가 일시적 현상에 그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최근 국회입법조사처는 '신규임용 공무원의 퇴직 증가 문제' 보고서에서 "공무원직의 인기가 되살아난다 해도, 근무환경과 인력 운영 방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청년층의 이탈과 인력 공백 문제는 반복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보수 현실화 ▲유연한 조직문화 조성 ▲합리적 업무 분배 등을 통해 지속 가능한 공무원직 선호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노량진에서 만난 한 수험생은 "월급 300만 원이면 공무원도 할 만하다 싶어 준비를 시작했지만, 합격해도 고된 업무와 인력 부족으로 조기 퇴사하는 사례를 보면 걱정이 된다"며 "안정적인 직업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난 만큼, 정부도 근무환경 개선에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