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난 집 문 열었다가 800만 원 배상 위기 .. 소방관의 '딜레마'

 광주의 한 빌라 화재 현장에서 인명 구조를 위해 소방관이 강제로 현관문을 개방했다가, 세대주들이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소방관의 실수가 아닌 정당한 구조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은 행정배상 책임보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결국 소방서가 배상 책임을 떠안게 될 처지에 놓였다.


"생명 구하려 문 열었을 뿐인데"…6세대 현관문 파손, 배상 요구

광주 북부소방서에 따르면, 올해 1월 새벽 관내 4층짜리 빌라 2층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은 화재 진화와 동시에 인명 구조에 나섰고, 불이 시작된 세대의 현관문이 열린 탓에 건물 내부는 시커먼 연기로 가득 찼다.

소방관들은 즉각 각 세대를 두드려 입주민 5명을 대피시켰고, 옥상으로 대피한 2명을 구조했으며, 1층에 있던 2명은 스스로 탈출했다. 그러나 새벽 시간대인 만큼 깊게 잠들어 빠져나오지 못했거나, 연기를 들이마신 채 의식을 잃은 거주민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소방관들은 응답이 없는 2~4층 6가구의 현관문을 강제로 개방했다. 불가피한 결정이었지만, 도어락과 현관문이 파손되면서 수리 비용이 세대당 130만 원, 총 800여만 원에 달하는 배상 비용이 발생했다.

누리꾼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사람 살리려다 문 열었는데, 배상하라는 건 너무하다”, “재난 상황에서 생명보다 문이 중요하다는 건가?”, “내 집 문 부서져도 안전을 위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나?”라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반면 “문을 부수는 게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는데, 너무 쉽게 파손한 것 아니냐”, “어차피 피해는 누군가가 떠안아야 하는데, 책임 소재는 분명히 해야 한다”는 반대 의견도 나왔다.


화재보험도, 행정보험도 '무용지물'…소방서만 골머리

보통 화재 진화 과정에서 재산 피해가 발생하면 불이 난 주택의 화재보험으로 배상이 이뤄진다. 하지만 이번 화재의 발화 지점이었던 세대의 집주인 A씨(30대)가 숨진 탓에 보험 처리가 불가능해졌다.

문제는 소방관의 실수나 과실이 아닌 적법한 구조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이라는 점이다. 소방서가 가입한 행정배상 책임보험은 소방관이 실수로 재산을 손상했을 때만 적용되기 때문에, 이번 상황은 보상 대상에서 제외됐다.


광주시소방본부는 유사 사례에 대비해 자체 예산 1000만 원을 확보해 둔 상태지만, 이번 배상금이 800만 원에 육박하면서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다. 연내 비슷한 사례가 또 발생하면 예산 부족으로 대응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생명 구하고도 책임 떠안는 현실…제도 개선 시급"

북부소방서 관계자는 “법률 자문 결과, 행정배상 책임보험으로는 보상받을 수 없다는 의견을 받았다”며 “현재는 소방본부 예산을 활용하는 방안을 비롯해 다양한 보상 대책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현행 제도의 허점을 지적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한 구조 과정에서 발생한 재산 피해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상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승현 법무법인 정우 변호사는 “소방관이 법적 절차에 따라 인명 구조 활동을 하다가 발생한 피해는 국가가 책임지고 배상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며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뤄진 정당한 행위까지 개인과 소방서가 책임을 떠안는다면, 구조 활동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생명을 구하려는 행동이 ‘손해배상’이라는 족쇄로 되돌아오는 현실에, 소방관들은 오늘도 딜레마 속에서 불길과 싸우고 있다.